전자책 종이책 듣는책 도서

우리는 책으로 들어가야 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저런 대사를 홍상수의 영화에서 들은 적이 있다. 영화는 중간에 껐는데 이상하게 저 대사는 머릿속에 남아 있다. 팬데믹이 터지고 생활방식이 뒤집어지면서, 정확히는 어린이집이 휴교하는 바람에 집에서 24시간 애 보고 일 하고 살림까지 하게 되어 매일매일 스트레스 지수가 한계치에서 찰랑 대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책으로 들어가야 한다던 대사를 수없이 떠올렸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책으로라도 들어갈 수 밖에.

처음에는 전자책이었다. 구글플레이에서 한국책을 잔뜩 사다가 스마트폰으로 읽었다. 한해 동안 가장 많이 읽은 작가는 아마도 박완서였다. 마흔살에 썼다는 전설의 데뷔작 나목부터 시작했다. 내용 자체도 좋았지만 지금껏 내가 잘 몰랐던 50년대의 시대상, 그것도 전쟁 중의 서울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이어서 80년대에 쓴 수필집을 몇 권 읽었다. 나는 다른 좋은 내용과 요소들은 제쳐두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고 느끼기 좋은 부분에 집중햐여 일심히 밑줄을 그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세대갈등과 집안 간의 충돌과 떨쳐낼 수 없는 온갖 사회부조리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잘만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함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박완서 이외에는 원래 좋아하는 커트 보니것, 폴 오스터, 성석제, 한강, 이창래, 카와카미 히로미의 책을 사들였다. 팬데믹이 처음 선언되었을 무렵, 여기저기서 무료전자책이 풀리고 유명한 작품들이 대폭 할인 한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이미 종이책으로 갖고 있는 걸 세일가에 전자책으로 다시 사기도 했다.

전자책은 언제 어디서든 휙 하고 주머니에서 꺼내 읽다가 휙 하고 치울 수 있어 편리한 반면 작은 화면을 자꾸 들여다봐서인지 눈이 금새 피곤해진다. 그리고 딸에게 자꾸 핸드폰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데 때마침 아마존에서 종이책 2+1 행사를 하는 것. 옳다쿠나, 연말에 언론에서 꼽은 2020 최고의 책 리스트를 보고 위시리스트에 넣어뒀던 찰스 유의 인테리어 차이나타운과 마이클 병준 김의 오퍼링스에 이창래의 최신작을 더해 질렀다. 인테리어 차이나타운은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연예계에서 동양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다룬 블랙코미디였다. 쇼비지니스를 지배하는 거대 백인자본이 동양인에게 허락한 유일한 주연배역인 쿵후도사(이소룡, 잭키 춘, 이연걸!)를 목표로 하지만 지금은 엑스트라역을 전전하는 윌리스 우가 주인공이다. 흔해 빠진 이민자 내러티브, 일방적으로 고생한 시점의 이야기로 내셔널북어워드를 수상했을 리가 없듯, 본작은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동양인의 이미지도 문제지만 그 제한적인 이미지에 스스로를 가두는 우리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더 넓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주먹질과 총질과 개드립을 섞어가며 요구한다. 재밌고, 책장 넘기는 맛이 있었다.

전자책이나 종이책 모두 자면서는 읽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 부부의 수면리듬은 완전히 뒤틀렸고 세 살이 된 지금도 새벽에 갑자기 눈이 뜨이고 잠을 못 이루는 일이 허다하다. 걷어차여서 깨기도 한다. 이럴 때 야간모드를 켜고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누운 자세로 책을 보려면 목과 어깨와 손목과 팔이 동시에 피곤해진다. 잠을 부르는 피곤이 아니라 그냥 힘들기만 한 피곤. 좋지 않다. 그래서 구글에 무료로 올라온 오디오북을 몇 개 받았다. 책의 내용에 관계 없이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낭독속도를 살짝만 늦추면 얼추 자장가 비슷하게 들린다. 한 시간 쯤 귀에 꽂고 있으면 슬슬 잠이 온다. AUDM이라고 하는, 최근 신문기사를 읽어주는 어플도 작년부터 기웃거리고 있다. 월정액제인데 일년치를 결제하면 좀 싸다. 다만 뉴욕타임즈의 자회사인 만큼 주류좌빨언론의 기사들만 취급하고 애국보수들의 시각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기껏 돈 내고 여러 신문의 기사를 접할 수 있다면 저쪽 얘기도 들어보면 좋을 거 같은데 고갱님 그건 안되십니다. 그래도 나중에 남는돈 있으면 신청해볼 생각이다.

주절주절 길게도 썼는데 다 페이크고 결국 킨들로 돌아왔다. 가볍고 눈 안 아프고 아마존 프라임 무료책 나오고 유료책은 적립금 땡겨다 살 수 있는 킨들이 짱이다. 크롬에 킨들앱을 깔면 현재 읽고 있는 창의 텍스트만 뽑아 기기로 보내주기까지 한다. 한글책은 구글플레이에서 사다가 확장자 변환하면 끝. 이제 책으로 들어갑시다.

덧글

  • 2021/03/03 12: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1/03/03 23: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1/03/05 07:0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1/03/05 23: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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